-
[영재학교 생활기] - 학생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낙서장 2019. 10. 16. 00:00
일단은 영재학교(영재고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출신자이다. 요즘 여러 이슈로 인하여 과거보다 영재학교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다. 이에 대충이나마 본인의 생활기(?)를 올려보려고 한다. 지금은 완전히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도움될 사람도 있을 것 같아 글을 쓴다(물론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개인적으로 저장하는 것도 있다).
영재학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생략하겠다. 그 이유는 워낙 몇 곳 없는 부류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율적인 운영과 학교별 차별화가 강조되는 부류이기 때문에 학교마다 편차가 큰 점을 들어야겠다. 하지만 입학 전에 알아두면 좋은 정보는 있는데, 몇 가지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예산이 아주 많다. (그러나 개인이 내는 돈은 적다)
- 학생수가 매우 적은 편이고,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 과학고와 달리 조기졸업은 거의 없다.
- 생각보다 학부 유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바로 외국으로 가는 것)은 많지 않다.
- 단순히 고등학교 과정의 선행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학점제, AP, (PT), (무학년제) 등의 독특한 제도와 자율적인 교육 과정이 운영된다.
- 실험과 연구를 자주, 많이 한다.
- 학생부가 별도 양식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예산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예산이 많다는 것은 곧 풍부한 기자재, 넉넉한 동아리 활동, 각종 클럽 활동 지원, 체험학습, 특별활동 지원 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학실에서는 물/화/생/지 4분야에서 고오급 실험장비를 살 만한 충분한 돈을 지원받는다.
실험 수업을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매 학기마다 실험기구를 보충하고, 실험 때마다 사용되는 재료를 사는 것도 다 돈이 들어간다. 실험 숙련도가 낮을수록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는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요리 재료를 낭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재학교는 예산의 힘으로 매주 실험수업을 진행한다. 덕분에 영재학교에서 화학이나 생명과학을 전공하면(관련 과목을 많이 수강하면) 그 분야에서 사용하는 실험기구 정도는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아리활동과 클럽 활동(학교마다 부르는 명칭은 조금씩 다르겠지만)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게 얼마나 좋은데?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말이지만, 예산이 많아야 활동을 많이 하고, 그래야 학생부가 풍성해진다. 가령 화학 실험 동아리를 예로 들어보자. 보통 아스피린 합성 정도는 해본다. 영재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IR 같은 기자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합성된 것이 아스피린인지 보는 정도는 다 한다는 말이다. 일반고라면 외부에 돈을 주고 분석을 의뢰해야 하는데, 학생 개인 차원에서 하기는 어렵다.
R&E는 일종의 소논문 활동이다. 보통은 일 년에 하나씩 세 번 하게 된다. 학교 차원에서 모든 학생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예산이 풍부하고 학생수가 적기 때문이다. 보통 2학년 때 하는 R&E에 지원되는 팀 예산이 800~1000만원 가량이다. 그 정도 돈이면 교수에게 지원 요청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잘한 돈(식비, 차비 등)을 빼고는 대학 연구실에 재료비 + 자문비 명목으로 넘긴다. 물론 모든 팀이 이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자문을 받는다는 것이 다 해준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문의 유무는 확실한 질적 차이를 만든다. 그곳에서 몸으로 일하고 혼나가며 연구의 기초를 하나하나 배우기 때문이다. 당장 영재학교 논문집을 구해 보면, 교수 자문을 받은 팀에는 오차 막대도 표시되어 있고, 뭔가 전문적이다. 많은 영재학교 학생들이 대학 자문을 받거나 인턴십을 하지만, 뉴스에 나왔던 것처럼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다. 이번 입시에서도 "조*"사태로 인하여 대학 자문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소서에서 R&E 활동을 지우는 학생이 꽤 있다고 들었다. 물타기는 하지 말자.
이제 학생수 문제를 보자. 적은 학생수와 기숙사 정책이 맞물려 작고 폐쇄적인 사회를 만든다. 게다가 이공계 특유의 선후배 문화까지 여기에 일조한다. 어차피 졸업해도 학계에서 다시 볼 사람들이니까.
과거에는 선후배 간 군기 잡기도 심했다. 요즘은 많이 나아지거나 사라진 상태라고 들었다. 신입생이 학교의 분위기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교지이다. 입학 초에 받으면 꼼꼼히 읽어보자.
기숙사 정책은 학교마다 상이하다. 보통은 음식물, 카드, 전열기구, 흉기(덤벨 등은 잘 모르겠다), 게임기는 보관할 수 없다. 기숙사 내에서의 학습 활동에 대한 규정은 학교마다, 시기마다 다르다. 어떤 학교에서는 정책적으로 몸만 들어갈 수 있게 하기도 하고(이는 룸메이트 사이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아예 노트북까지 가지고 들어가 모든 종류의 학습이 가능한 곳도 있다. 하지만 학습물을 반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학교에서도 어찌어찌 숨겨서 공부할 수 있다고 들었다.
기상 시간은 7시 정도이다. 보통은 아침에 운동(태권도나 검도 등)을 하기도 하지만, 일부 학교는 없다. 학생들은 보통 7시 전부터 일어나 준비하거나, 아예 한계까지 늦잠을 자다 허겁지겁 나온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후자가 많아진다. 둘 다 겪은 입장에서는 무조건 기상 시간이 늦은 것이 좋다. 늦잠도 잘 수 있고, 빨리 일어난 사람은 먼저 가서 자습을 할 수 있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는 명확히 다르지만 많이 착각한다. 그 이유는 지방 영재학교의 교명이 "~과학고등학교"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이름은 과거 과학고등학교였던 학교들이 영재학교로 전환하면서 과거의 이름을 유지한 것이다. 보통은 구분을 위해 "과학영재학교"를 붙인다.
영재학교는 조기졸업이 거의 없다. 그냥 없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 때문에 합격한 영재학교를 버리고 과학고에 진학하는 것은(설사 가장 "낮은" 영재학교와 "높은" 과학고라 하더라도) 미친 짓이다. 아직은 영재학교 타이틀의 네임벨류가 상당하다.
학부 유학 역시 적은 편이다. 보통은 성적이 되면 애매한 유학길에 오르기보다는 서울대나 상위권 의과대학을 택한다. 이공계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유학은 석박사 과정에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제 나머지 특징과 함께 연계해서 이야기하자면, 학부 유학이 적다는 것은 모든 학교 생활이 국내 대학 입시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학을 갈 생각이라면 입학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해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니, 영재학교는 입시와는 거리가 먼 "귀족학교", 어나더레벨이 아니었나?
아니다. 우선 영재학교 재학생 중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 부자인 것은 절대 아니고, 무엇보다 사회적배려대상자도 전형으로 뽑는다. 예산은 엄청나고, 당연히 특별 활동의 수준도 대단하지만 학생 개인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 혈세로 운영된다.
또한 영재학교는 입시의 피안에서 자신만의 활동, 심화 학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영재학교 역시 정상적인 절차로 대학에 진학하는 곳이다. 대한민국 땅에서 살면서 입시에서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재학교가 대학 입시에서 아주 많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우선 대학이 아무리 블라인드로 평가하더라도 영재학교를 무조건 알아볼 수 있다. 학생부 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25~40장 정도로 특별활동이 잔뜩 들어간다. 게다가 AP 과정 등 심화 학습이 잘 이루어지므로 학생들이 수준도 높다. PT는 입학 당시 우수한 과목에 대하여 과목 수강을 면제해주고, 대신 심화 과목을 듣거나 자습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보통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합격한 사람이 그냥 정상적으로 과목을 수강하기도 한다. 무학년제는 우리의 꿈과 로망처럼 "내가 잘하는 과목은 선배들과, 부족한 과목은 천천히" 듣는 것이 아니라, 학점 세탁을 위해 "재수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차피 재수강하면 대학 측에서 알기 때문에(혼자 다른 학기에 해당 과목을 들었으니) 재수강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경우가 많다.
학점제는 아주 좋은 제도이다. 물론 영재학교가 이걸 시행할 수 있는 데에는 적은 학생수, 많은 교사, 수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교과 편성(기하학, 유기화학, 분자생물학, 기기분석)의 가능성, 많은 예산 지원이 밑바탕이 된다. 우선 학점제는 필연적으로 과목을 여러 개 개설해야 하고(그렇지 않다면 기존과 다를 게 없다) 그러자면 한 과목 당 학생수가 줄어드니 많은 교사가 필요하다. 학생들 간에 시간표가 꼬이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고, 혹여나 졸업이 유예되는 학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살펴야 한다. 일반고에서 하기는 무리다. 애초에 영재학교에서도 한 트랙(수, 물, 화, 생, 지, 정)에 한두 과목만 개설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사의 역량도 중요하다. 보통은 영재학교 교사도 고등학교에서 온다. 신참 교사가 커리어를 위해 오는 경우도 있다. 교수를 초빙하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따라서 고급 미적분학이 됐건 해석역학이 됐건 교사들이 대학 때 경험을 살려서 지도해야 한다. 물론 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에 준비하고 수업하시지만, 고등학교 과정보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교재와(매번 개설되는 과목이 비슷하다) 사교육의 보조가 작용한다.
결론은, 가고 보자. 보통 중학교 2학년 때, 경험을 쌓기 위해 영재학교 입시를 치르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 합격하면 보통 다니는 것을 선택한다. 설사 원하던 학교가 아니라 지방 영재학교라도 마찬가지이다. 영재학교는 현행 입시제도에서 아주 유리하다. 학생부 종합전형에 딱 맞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 취지를 잘 살리면서(정말 많이 배울 수 있다) 대학 진학도 잘할 수 있다.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재학교 생활기] 노트북 활용법 (0) 2022.02.03 [영재학교 생활기] 세금으로 할 수 있는 활동들 (0) 2022.01.31 [영재학교 생활기] 의대 진학의 유불리 (0) 2022.01.31 생각들1 (0) 2022.01.31 [영재학교 생활기] 합격하면 할 일 (0) 2020.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