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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통 속으로 들어가기낙서장 2022. 2. 20. 22:00
<<시험기간에 무지성으로 써 내려간 일기이므로, 진지하게 읽지 말 것>>
미래에는 의사가, 그것도 내과의사가 VR과 같은 회사에 취업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아니, 뇌과학자나 신경과도 아니고, 정신과도 아니고 왜 하필 내과의사냐?
우선 나는 현재 단계의 VR(가상현실) 기술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현재의 VR 기기들은 시각, 청각, (일부) 촉각과 같은 정보 수용기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헤드셋을 쓰고 화면상으로 가상현실을 보고,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햅틱 피드백을 느끼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VR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우선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감지하는(소위 오감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기가 극히 어려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애플이 홍보하던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있다. 디스플레이의 픽셀 크기를 충분히 줄이면, 인간의 눈으로는 더 이상 개별 픽셀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동공은 상당히 작아서, 분해능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스마트폰 화면을 가상의 화면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화면 주위의 요소와의 불일치성으로 인해서, 즉 베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히 세련된 그래픽과 적절한 밝기로, 초고해상도 화면을 시야 가득 보여준다면, 더 이상 우리는 시야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모두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흔한 시청각 및 촉각부터 시작될 것인데, 어쩌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위하여 볼을 찌르거나, 냄새에 집중하거나, 음식 맛을 보려고 시도해야 하는 현실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더욱 발전한 가상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 사실 인간의 뇌는, 기껏해야 12쌍의 뇌신경 및 31쌍의 척수신경을 통하여 정보를 공급받는다. 개별 신경세포의 축삭마다 전극을 연결해서(신경외과적으로 무척 까다로운 시술일 것이지만) 우리가 action potential을 유도할 수 있다면, 즉 뇌로 들어가는 모든 입력 (전기) 신호를 조절할 수 있다면?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VR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매우 진보한 VR이라고 할지라도, 인체 내부에서 오는 신경들에 직접 손대지 않고는 현실과의 괴리를 배제할 수 없다. 9시간이고 10시간이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게임에 빠져서(무척 낮은 수준의 시청각 가상현실임에도) 아사하는 드문 사례가 나오고는 하니, 어쩌면 생각보다 내부적인 감각은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재적 신호를 차단하지 않고는, 완전한 VR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차단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고통의 부재를 통해 현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것이므로, 아예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배고픔을 조절하는 신경 신호를 끊어버리고, 가짜 정보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아사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 몸의 고통과 통증은 생존에 필수적인 신호인 경우가 꽤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히 발전한 VR 회사는, 인체의 생존을 위하여 자율적으로 영양 등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우리 몸의 신호를 모방하려면 우선 인체의 생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만한 시스템의 설계를 위하여, 내과의가 고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품어본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법과 제도가 존재하기에, 며칠이고 몇 달이고 지속되는 VR은 금지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배설은 상당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그 외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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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하나 더 생각해 볼만한 거리가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몸이란 무엇인가? 신체란 무엇인가? 충분히 발달한 가상 감각을 제공할 수 있다면 신체는 단지 뇌를 지탱하는 거추장스러운 부속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먼 미래에 스스로 뇌와 척수를 적출하여 통에 들어가는 시술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가상현실이 충분히 발달한 미래를 가정하자. 아마도 현실과 같은, 매우 유사한 가상현실이 여러 버전이 만들어질 것이다. 회사마다 하나의 지구를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중추신경계를 제외한 몸은, 가상현실에 들어가기에 거추장스러울 뿐인 제약이 될 수 있다. 인어공주가 지느러미를 버리고 다리를 선택한 것처럼, 인간 역시 몸을 버리고 전극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우리 역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완벽한 시스템으로 통 속의 뇌에게 영양 공급과 산소 공급, 노폐물 제거 기작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까? 자손 번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이 남는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 물리적 신체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스킨십)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 행위이다. 몸을 포기한다면 사실상 플라토닉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을까. 강제로 성적 자극 신호를 넣더라도, 이것은 컴퓨터를 통해 에로스를 중매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완벽한 기술적 발달이 이루어져서 통 속의 뇌가 자신의 체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고, 자신의 염색체끼리 교차와 자가수정을 통하여 인공적인 아이를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이러한 과정을 통 속의 뇌의 의지만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 삼을 곳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이지만, 일단 기술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사실상 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뇌 자체의 퇴행적인 질병만을 해결한다면, 사실상 영생이 가능한 구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닮은 아이(혹은 피조물, 뭐라 부를지는 각자 다를 것이다)를 온전히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완전해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영생을 하며 자신만으로 인격을 가진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존재,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더 모르겠다. 스컬이나 더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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